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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Diary

사랑하는 에쯔 청년 여러분께

by actor_zoo 2013. 8. 9.
그가 말했다. "항복하러 왔습니다."
마더 커크(Mother Kirk)가 말했다. "잘했어요. 참 멀리도 돌아서 여기까지 왔군요. 내게 맡겼더라면 짧은 시간 안에 데려왔을 텐데. 그래도 잘 왔어요."
존이 말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녀가 말했다. "걸치고 있는 누더기를 벗어야 해요. 당신 친구는 벌써 그렇게 했어요. 그리고 이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야 해요."
그가 말했다. "맙소사. 저는 다이빙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배울 게 없어요. 다이빙 기술이란 새로운 것을 하는 게 아니라 하던 일을 그만두는 거니까요. 그냥 몸을 던지기만 하면 돼요."
- C.S. 루이스, <순례자의 귀향> 중.

사랑하는 에쯔 청년 여러분,
연극과 영화를 사랑하고 연기를 사모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큰 삶의 변화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요? 여러분들은 어떤 삶의 변화를 경험하셨고 꿈꾸고 있나요? 아마도 에쯔라는 공간에 들어 온 사실 하나도 여러분의 삶의 변화 중 일부일겁니다.
어쨋든 우린 삶의 변화에 대해 고민을 해봐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는 존재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문학자, 가오싱젠은 인류는 결코 진보를 향해 나아가지 않으며, 진보를 위해 살아가지도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통해 인간은 고찰은 하지만 그것이 현재의 변화발전을 야기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요즘 대세인 철학자 강신주 선생은 인류는 문명이래 한 치도 진보하지 않았다고도 하더군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의 변화는 우리의 자생적 힘으로는 발생되거나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것(개인적으로는 모든 것입니다만)이 외부의 요인에 기인합니다. 그 중 가장 빈번히 경험하는 것이 바로 환경의 변화이지요. 그리고 관계의 변화, 그 중에서도 새로운 관계의 형성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요. 반대로 좀처럼 자기 중심에서 일어난 변화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에쯔만 돌아봐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 때문에 변화되었구요. 그리고 여러분은 여러분들 개개인의 관계 속에서 또 목사님과 저를 통해 변화되었으니까요.
아마도 사람들은 그래서 '멘토'를 강조하고 '웰빙'에 집중하나 봅니다. 멘토는 스스로 공부하는 힘든 과정을 좋은 선생을 통해 보다 쉽게 체득되는 공부를 위함도 있지만, 사실 자신은 스스로 변화될 수 없음을 시인하는 일종의 행태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웰빙은 지금의 삶보다 나은 삶을 사는 것의 총칭인데 먹거리의 변화와 다이어트 정도로 취급되어 버렸지만, 이것도 역시 지금의 삶이 문제가 많다는 방증이 아닌가 싶어요.

여러분, 삶의 변화는 꿈의 변화이기도 하고, 꿈의 변화는 바로 꿈의 구체적인 형태로의 나아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꿈의 본질은 존재에 대한 인식에 기인하구요.
앞에서 말했듯이 사람은 사람 사이에서 실제 빈번한 변화를 주고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람에겐 손익계산의 관계 타산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때 사람은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이득이 되나?'하고 말이죠. 맞습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거든요. 카일 아이들먼 목사는 사람이 선택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선택할 수 없는 선택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이처럼 사람의 관계 속에서 변화하지만 그 관계의 맺음에는 자기 잇속의 선택을 취하게 됩니다. 그것이 상생의 선택일 경우도 있지만 사실 그 기저에는 자기독식의 이기가 도사리고 있을 경우가 허다 합니다. 이로 인해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기도 합니다. 누구나 쉽게 경험하는 일이지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은 우리가 모색하는 삶의 변화의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빈번히 합니다. 이는 우리 중심이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사실 그 중심이 우리의 삶의 형태를 결정 짓기 때문이지요.
앞서 말한것 처럼 사람은 그 중심을 자기자신에게만 둡니다. 그래서 이익이라는 것을 선택의 기준으로 두어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죠. 삶의 변화를 모색하고자하는 사람간의 관계가 사실 자기이익의 형태로 삶의 변화가 아닌 퇴화가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그럼 우린 우리의 중심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할까요?
우린 외부의 자극에 의해 변화된다고 얘기했습니다. 사람은 그 중심을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이 자기의 중심이라도 말이죠.

에쯔 청년 여러분,
내 중심은 사람에 의해 변화됩니다. 하지만 그 변화는 내 삶의 목표를 정확히 짚어주지 못합니다.
우린 우리의 중심을 아는 이에게 의존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고 그 바탕 위에 우리의 올바른 삶의 변화를 일구어 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이는 하나님 뿐 입니다.
지금은 비록 '나'라는 존재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나아가겠지만, 이내 하나님은 '나'라는 존재를 '이웃'이라는 존재로의 초점 변화를 가지게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이내 '나'와 '이웃'을 '하나님'에게로 옮겨 초점을 맞추실 겁니다.
다소 복잡하지요? 아니예요. 복잡한 것 같지만 그것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머리글에 적어둔 C. S.루이스의 글에 '그(존)'를 '나'로 '그녀(마더 커크)'를 '하나님'으로 바꾸어 보세요.
그래요, 우리가 걸어가고 모색한 우리의 변화에 하나님이 없었다면 우린 하던 것, 즉 우리의 생각을 멈추어야 해요.
그리고 얘기해야 합니다. "항복하러 왔습니다!"라고.

에쯔 청년 여러분,
여러분의 발자취는 모두 하나님이 여러분을 선택하신 그 선상에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 수많은 선택 중에 하나를 우리의 의지로 하여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 입니다.

식구가 되길 원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밥을 나누어 먹는 식구가 되길 여러분께 제안합니다.
그 식구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밥이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기도 후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더욱 더 확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때요? 저랑 기도를 함께 하는 식구가 되지 않을래요?
그리고 행복한교회의 모든 이들과 함께 식구가 되지 않을래요?
여러분, 교회로 갑시다. 예배를 드립시다! 그리고 에쯔의 비전을 함께 품자구요!

사랑합니다!

2013.08.09. 서울에서 행복한교회 집사이자 에쯔와 함께 하는 그리고 벌써 여러분이 그리운 조창주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