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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일본소설

설국(雪國) - 가와바타 야스나리 / 민음사

by actor_zoo 2023. 8. 26.

어렸을 때부터 집구석 조그마한 책장에 꽂혀 있었던 책, <설국>. 지금 생각해보면 그 책을 누가 사서 꽂아 뒀을까 궁금하다. 새벽같이 출근해서 새벽같이 퇴근했던 아버지가 그랬을까? 아니면 다섯 식구 입 간수에 살림으로 빠듯했던 어머니가 식구들 몰래 짬을 내서 보셨을까? 그 당시 집안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책이 어떤 과정을 거쳐 안방 책장에 자리를 잡았는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아니, 어쩜 이 책은 나를 만나기 위해 그 곳에서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1학년(당시는 국민학교라 했다) 때, 한글을 이제 막 익힌 내게 '설국'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 왔다. 내 기억으로는 누구에게 묻지도 않았는데 책 제목을 보고 눈이 수북히 내린 왕국을 생각했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신기하다. 과거, 학교에 입학을 해서 한글을 배웠던 세대에게 비록 한글로 '설국'이라고 쓰여졌지만 그래도 한자를 모르면 그 뜻을 알 수 없는 단어를 알았다는 게 아직도 미지수다.

그 시절 나는 세로로 읽어야 하는 작은 문고판 <설국>을 한 페이지도 채 넘기지 못했다. 그게 맘을 상하게 했다. 한글을 읽을 수는 있는데 도대체 소리만 낼 수 있지 그 뜻을 헤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속상함이 초등학교 시절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그 때부터 내 맘 속에 저 책, <설국>을 언젠가는 다 읽겠노라는 각오를 다지게 했나보다. 그 다짐이 책이라는 물건에 관심을 가지게 했다. 그러니까 <설국>은 내게 독서의 최초 동기를 부여한 책인 셈이다. 

 

 

책장을 넘기면 코털이 뻣뻣해질 것만 같은 눈바람이 몰아 치고, 나는 시마무라(島村)의 바로 뒷좌석에 앉아 있다. 그가 차창으로 반사된 요코(葉子)를 몰래 훔쳐볼 때, 나도 시마무라를 그렇게 바라보았다. 그가 요코의 눈동자에 등불을 교차하여 보고 있을 때, 나는 그의 얼굴에 내 얼굴을 겹쳐서 차창에 반사해 보고 있었다. 

허무의 세상을 뚫고 어딘가에 있을 희망의 찌푸라기를 찾아 분연히 일어서는 주인공들은 조물자가 내려준 자연을 묘사할 수 없다. 그들은 자기 잘난 맛에 사건을 만들고 해결한다. 그리고 세상은 정의롭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반면, 허무의 세상을, 허무함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허무해서, 그냥 그 허무함을 인정해 희망조차 헛수고인 것을 알면서도 헛수고의 희망을 품고 한 발 한 발 띄는 것이 자신의 운명인양하는 자만이 자연에 자신의 감정을 그려 넣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점에서 차창으로 비친 시마무라의 얼굴과 내 얼굴의 교차가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9일 만에 만난 고마코(駒子)는 게이샤가 되어 있었다. 아니, 게이샤가 되어 고마코가 되었다. 여자치곤 따뜻한 손을 가진 그녀는 시마무라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가락으로 무수히 많은 흔적을 남겼다. 그녀의 몸에서 흐르는 열기가 장지문을 열어져 치면 하얀 눈이 덮인 산 때문에 더욱 짙어진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더욱 빛나는 별들이 그녀의 젖가슴을 관통해 시마무라에게 쏟아진다. 

소설 이곳저곳에 쌓인 눈들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고 잠들고 만나고 하면서 애태우는, 아니 애태우기 위해 일어나고 잠들고 만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남녀의 무위의 한숨이다. 

 

이 소설과의 첫 번째 만남에서는 풍경의 글자들에 취해 사람을 보지 못했다. 두 번째 만남에서야 비로소 사람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내면의 파동이 풍경에 글자로 아로새겨졌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인생은 헛수고의 연속이다. 그렇기에 차마 애처로워서 애착이 가는 것이다. 헛수고의 결과를 알면서도 헛수고를 행하는 것, 그것을 알고 사는 것이 참 인생이다. 소설은 그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온천마을 낮은 지붕에 가뜩이나 눈이 쌓여 더 낮아진 가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을 상상해본다. 집 입구마다 드리워진 차양이 통로를 만든다. 지붕에 쌓인 눈을 치울 곳이 없어 길가로 떨어뜨려 쌓아 놓는다. 문제는 길을 건너는 것이다. 그래서 건너편으로 통하는 통로를 뚫는다. 그 통로를 통과하면 마치 누에처럼 하얗게 될 것만 같다. 시마무라가 고마코를 바라볼 때마다 느끼는 생경함이랄까. 마치 면도를 방금 한 얼굴을 대하는 것 같이. 그렇다. 시마무라는 허무의 세상에서 변화를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서, 산에서, 삼나무에서, 눈에 덮이지 않는 파밭에 파를 보면서, 고마코의 목덜미 깊이 보이는 빨간 속옷에서, 그의 손바닥에서 따뜻해지는 그녀의 젖가슴에서, 은하수의 물결 속에서, 잿더미가 된 고치 창고에 투신한 요코의 들어 올려진 턱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