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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한국소설

비밀정원 - 박혜영 / 다산책방

by actor_zoo 2014. 10. 19.



책장을 펼치면 사방에 사계(四季)가 흩어진다.

한 쪽은 무더운 매미 소리가 귀 속을 자극하고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면 은행이 떨어져 코 끝을 자극한다. 이쪽을 보다 저쪽을 향하면 마치 창조주가 세상 율려(律呂)의 이퀄라이져로 디졸브를 하는 듯 절묘한 교차가 이루어진다.

시계를 매고 헐떡대는 토끼도 없고 공간이동 방망이도 없는데 『비밀정원』한 권이면 다른 세상에 몸을 이동하게 된다.

시골의 성장 추억이 있다면 각 독자의 일기장을 윤색한 것처럼 소설은 다가올 것이고, 도심에서 자랐다면 여느 시골 촌놈보다 훨씬 고급스럽고 부유하지마 겉과 다른 지독하고도 소동스러운 한 개인의 가정사를 보게 될 것이다. 

세월은 연대기가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라고 소설 속 이율이 말했들이, 소설은 이요가 20여년 떠난 자신의 집 '노관'에 귀향하면서 그 집과 그와 엮였던 과거 기억의 덩어리를 책자로 우리에게 투척된다.


여느 소설이 노래하듯 사랑이며, 지독한 운명이며 지순한 갈구가 『비밀정원』에 누구나 다 알지만, 예의 비밀스럽게, 노관이라는 집을 배경으로 이루어진다. 아버지와 할머니를 순서로 여의고 큰 집과 큰 땅의 주인이 된 어머니, 그리고 형님의 부고 이후 먼 곳 독일에서 돌아온 율이삼촌. 이 소설은 율이삼촌의 등장에서부터 마치 식탁 위에 얌전한 찻잔이 떨어져 깨지듯, 멀쩡한 기타줄이 끊어지듯, 거대한 힘의 눈을 숨기고 있는 작은 소용돌이의 운명이 뒤숭숭하게 책장마다 풀풀 풍기기 시작한다.

요는 어머니와 삼촌의 숨겨진 사랑의 비밀이 하나씩 긴 시간의 간극 안에서 들어날 때마다 담담하게 반응한다. 마치 독자에게 모든 충격을 받아 안으라는 듯이, 아니 마치 이것이 운명이니 그것을 어찌 할 수 없다는 듯이. 그도 아니, 되려 크나큰 충격이 비밀처럼 소설의 끝자락을 덮을 때 소스라치게 일어나게 할려는 듯이... 그렇듯 『비밀정원』의 사랑은 캐서린과 히드클리프처럼 뜨거우나 그 배경은 저 워더링 하이츠와는 극과 극이다.


작가의 전원 묘사 메타포는 소설을 덮으면 더욱 살아나 다시금 현재 내 공간을 섬세하게 쳐다보게끔 세뇌한다. 그리고 짧은 시간 내에 과거를 추억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다시금 『비밀정원』으로 발길을 옮기게 된다. 


『비밀정원』에는 누구나 함께 했던 암울하고 획일적이고 독단의 근역사가 있다. 누구나 선뜻 꺼내기 싫어하기에 손보지 못한 미결의 역사다. 그래서 그 역사는 다들 아는 비밀이 되어 우리의 기억 속 뇌관에 누워있다. 율과 어머니의 사랑이 과거의 굴레에서 꽃 피우지 못했지만 그들의 사랑으로인한 존재들은 여전히 그들 만큼 사랑할 것이며 그들처럼 이별할 것이다. 이안, 테레사가 김경수랑 그러했고 그의 아들도 그러할 것이다. 역사도 그렇게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삶 둘레에 테두리를 치고 있다. 과거의 잘못된 역사가 반면교사가 되어 우열의 역사로 진화되어가지 못하는 현실의 안타까움을 소설이 바라보게 한다. 

그러나 우린 사랑으로 다시 일어날 것이다. 언제나 사랑에는 장애가 있었고 그래야 사랑은 사랑으로 자리매김했다. 그것은 시작이 있고 끝은 없는 것이며 곧 시작이 성공이다. 역사에도 인륜에 반하는 세력이 등장한다. 그것이 역사의 테두리를 곤고히 하게 된다.


먼 곳을 돌아 마침내 선산에 나란히 묻힌 연인의 자손들이 다시금 그 무덤 봉분 사이에 누워 하늘을 쳐다본다. 수많은 별들.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이루어질 수많은 사랑들.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책두께 이상의 먼 길을 돌아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사랑은 연대기가 아니라 사람이 살아있다는 존재 그 덩어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