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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영미소설

한 여인의 초상 - 헨리 제임스 / 창비

by actor_zoo 2014. 5. 10.




"관찰, 사람을 관찰하는 것, 이것이 탁월하다는 것은 사람을 자기입장에서 십수차례 곱씹었다는 것을 뜻한다. 

관찰은 모두 자기입장에서 시작되고, 보다 면밀한 관찰은 오히려 객관성을 떠나 자기정서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 인상 깊은 서문


우선, 헨리 제임스의 작품을 첫 대면함을 고백한다.

여느 20세기초반의 사실주의 작가처럼 사람의 군상을 원고에 늘어뜨려 놓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첫장을 열었다.

그런데, 만만치가 않다. 우선 특히하게 독자를 맞는 것은 바로 여느 소설에서 볼 수 없는 다소 긴 서문이다. 이 서문에서 받은 인상은 비단 그 길이에 있지 않다. 작가가 소설을 바라보는 문학의 가치, 곧 그의 철학이 작은 논문처럼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은 작가가 소중히 그 소재를 선별하여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하고 면밀한 설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은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아도 뻔히 추측할 수 있는 것이며 실제 그러하다. 그런데 작가는 마치 소설을 생물처럼 다룬다. 작가의 상상의 중요성을 피력하면서도 마치 그 상상 또한 이미 자기에게 주어진 대상(소설의 소재)에 의해 조정되는 듯 보고 있다. 자기를 담금질하고 공정하여 소설의 창조자로서의 권위를 펜에 집중시켜 시커먼 필취로 갈기는 빡빡한 여백없는 치열함의 결과보다 소설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고 인물들에게 여유를 부여하며 관조하고 거기에 수줍은 관찰자로서의 유유자적의 창조자가 지도를 펼쳐놓고 대서양을 오가며 써내려가는 한마디로 소설의 인물에게 소설을 진행하는 살아있는 소설을 지향하는 작가의 사상을 옆볼 수 있다.

소수의 소설가들이 소설을 써놓고 출판을 지연하는 이유가 자식을 세상에 분가하는 생물의 가치 이입과는 그 차원이 다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작가의 가치관은 아마도 시대적 기류인 사실주의에 있는 듯하다.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러시아의 문호(이반 뚜르게네프)에 힘을 얻는 부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 희곡같은 불친절? 아니, 극도의 친절이 야기한 불친절처럼 보이는 소설


지하철을 타면 그 수는 적지만 책을 보는 독자를 볼 수 있다. 그런데 태반이 소설이다. 아니면 허파에 바람을 넣을 자기계발서나 외국어와 관계된 참고서일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왜, 희곡은 보지 않는 것일까?

사실 그 의문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너무나도 뻔하다. 희곡을 한 번이라도 읽어봤다면 쉽게 알 수 있다. 희곡은 공연을 전제로 하기에 참으로 불친절하다. 글을 보면서 머리 속에서 독자가 다시금 상황을 언어로 재차 창조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물론 이를 즐기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독자는 애써 수고를 하길 원치 않는다. 곧 희곡은 색맹테스트의 점묘카드처럼 독자 스스로가 숨은 숫자를 밝혀내야 한다. 색맹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하지만 소설은 희곡과 반대다. 소설은 비교적 친절하다. 거기다 통속적인 내용을 현대적 기호로 풀어나간 소설을 만나면 독자는 그냥 책장을 넘기며 수동적인 태도만 유지해도 그냥 소설에 만족할 수 있다. 그런데 간혹 희곡보다 더 불친절하게 느껴지는 소설이 있다는 것이 당혹스러울 때도 있다.

바로 그러한 소설이 <한 여인의 초상>이다. 

이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불친절한 느낌을 준다. 아니 너무나도 세밀한 인물의 겉과 속을 드러내는 과도한 수의 글 때문에, 친절의 과중이 불친절을 야기해보인다. 하지만 이를 불만으로 여길 것이 아니다. 바로 그것이 이 소설의 매력이기 때문이다.

당장 내 주위의 사람을 글로 표현해보라. 쉽지 않다. 그럼 말로 해보라. 소유하고 있는 언어의 수가 적다. 그렇다면 생각만 해보라. 곧 생각도 언어임을 망각했음을... 머리를 선반에 올려 무거운 쇳덩이로 짓눌러 골수를 쥐어짜내도 사람을, 정황을, 심지어 날씨를 표현하는 언어는 쉽게 흘러나올 것 같지 않다. 헨리 제임스는 분명 많은 언어를 소유한 작가임에 분명하다. 거기다 그는 좋은 눈을 가지고 있었음에 확실하다. 이 소설은 그 눈의 기억을 머리 안에 빼곡히 차있는 글로 옮긴 것이며 독자는 그것을 천천히 드려다보면 마치 소설 속의 인물이, 날씨가, 사건의 현장에 자신이 발을 디디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글들이 독자의 일상적 언어의 나열과 사뭇 달라 불친절의 소설로 취급될까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이 소설의 참맛을 가시게 할 수는 없다.


- 미국과 영국 두 문화, 대서양 사이에 침몰하지 않는 소설



* 이 소설에 대한 리뷰는 두번에 걸쳐 쓰겠습니다.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