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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한국소설

눈가리고 책읽는당 2기 - 단서: 구두, 10 그리고 내성적인 / 창비

by actor_zoo 2016. 1. 22.



사람은 누구나 연기를 한다. 행동뿐아니라 목소리도 여러 개 가지고 다닌다(어떤 이는 사투리를 여러 가지로 구사한다). 누구는 그것이 본능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모방이나 유희적인 것이 이에 속한다. 또 누구는 종교적인 것이라고도 한다. 하기야 요즘 돌아가는 종교판을 보면 맞는 말 같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구는 지배하고픈 우위의 본성 때문이라고도 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사실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대부분, 사람들의 연기는 매우 훌륭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행하는 자의 입장에서 말이다. 그렇담 왜 사람들은 연기를 할까? 그건 아마도 연기를 하는 매 순간, 너무나도 성취하고픈 욕망이 발생하기 때문이 아닐까?  연기는 마음과 신체가 혼연이 되어야 한다. 신체가 그 욕망을 해결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마음을 이끌어 연기를 할 것이고, 마음이 동한 상황에서는 신체가 그 마음에 합당한 연기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걸 그럴듯하게 하려면 그 욕망의 바람이 강해야 한다. 그런데 그 욕망은 대체 뭔가? 어디서 오는가? 사실 평범한 사람들의 욕망은 명예나 금전을 목숨처럼 생각하고 있는 정치인이나 재벌들 같이 비범하지 않다. 과학자나 철학자처럼 창발적이거나 고상하지도 않다. 대부분 즉발적이거나 환경적이다. 때로는 동기가 불분명할 때도 있다. 물론, 소소한 자존심이나 작은 이익, 열등감으로 인한 거짓 허세 같은 지나고나면 쑥스러운 것들이나, 집단적 억압에서 일어나는 생존의 아부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오히려 반대로, 목숨이 달린 다급한 상황이나 촌각을 다투는 선택의 순간에 평범한 사람들의 연기는 무용지물이 되고 본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암튼, 지극히 평범한 우리네들은 소소한 것에서 매우 훌륭한 연기를 해낸다. 


그런데, 욕망과 관계 없는 연기를 한다면? 동기 없는 행동, 이유 없는 반항, 조그마한 자극, ..... 지독한 개인주의적 당위...

사실 우리 마음 속에는 겉과 다른 지나친 부정과 긍정의 뒤틀림이 또아리 틀고 있다. 그것이 가끔 작용반작용처럼 당사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발동될 때가 있다. 그것도 대부분 내성적인 사람에게서 말이다.


소설은 열 가지 짧은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모두 1인칭 시점으로 자기네 소리를 외치고 있으니, 사실 10명의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는 게 맞겠다. 얼핏 보면 소설의 내용은 약간 일그러진 듯 보인다.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환경에서 누구나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일, 즉 있을 법한 일들을(내겐 없었으면 하는) 담고 있다. 마치 글귀 하나하나가 착시되어 불만에 가득 차 보이는 10명의 심사처럼 비뚤어져 보인다. "독특한 사람들이다."라는 말 끝에 동화(同化)가 일어난다. 왜일까? 그렇다. 이들은 바로 평범한 우리네 연기를 하고 있다. 

나름 중산층으로 갖출 건 갖춘 집 안 안주인(구두), 무력하나마 자기 손으로 건사하는 가족을 가진 남자(팜비치), 소심하지만 아내를 처방전에 약품처럼 관찰하는 약사(오가닉 코튼 베이브), 자신은 초라함을 신수 좋은 남편으로 대리만족하다 사고를 당한 남편의 몰골에 주체적으로 변한 아내(틀니), 피노키오가 되어버린 계약 아내(홍로), 소설가보다 더 소설을 쓴 시골 여인(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 딸이 아니라 임신이 문제이고 심지어는 자가당착적인 아버지(타투), 산전수전을 지나 술(酒)전에서 승리한 남자(대머리), 배보다 배꼽이 아니라 책장보다 하이데거 아내(파란 책), 동정의 살인자(집이 넓어지고 있어). 모두 내밀한 내적 성격(내성적인)의 소유자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수동적인 인물들이다. 그러다 가끔 능동적으로 행동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도 모르게 드러나는 욕망이다. 그러나 너무나도 내성적이고 열등하기에 그들의 욕망은 순간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내 행동되어질 때 그 미미함의 파장은 큰 결과를 이끌어낸다(그것도 그들의 생각뿐일 수 있다). 

10가지 얘기들은 모두 만족스럽게 완결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 10명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지겹도록 증오하는 자기의 성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은 짧지만 긴 얘기를 하는 듯 미완의 마무리를 하고, 독자는 그 미완의 테두리에서 인물들의 지독한 열등과 자기승리, 교만 그리고 해결책 없는 무책임의 도주 안에서 지속적으로 메아리 칠 그들의 소리를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이 이 소설의 매력이다.


이 소설을 연극으로 만든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다. 이미 소설 속 인물들이 연기를 하고 있으니 그 자체로 연극이다.

아니, 재미없는 연극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본시 드라마는 우리네 얘기와 거리가 있어야 하는데 이건 우리네 얘기가 아닌가.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게 어떻게 우리네 얘기야? 말도 안 돼!" 그렇다면 당신은 타인의 낡은 구두가 사실 자기의 구두였음을 모르는 자기부인의 내성적인 사람일 것이다(나는 아직도 '구두'라는 얘기에 나오는 작중화자가 그집 안주인이 아니라 가사도우미로 찾아온 여자의 거짓 진술 같다).


이 소설은 분명 여자가 썼다(아니면 말고). 아주 내성적인. 애착을 가지는 것을 반비례로 멀리서 관찰하고, 한 번 가진 물건은 버리지 못하는 낡은 구두를 가진 여자를 상상해본다. 작가가 궁금한 소설이다.